이 탑은 전탑계 모전석탑(7층)으로 탑신부를 구성한 횡전재는 회록색의 석회암으로 크고 작은 모양의 직6면체를 질서 정연하게 쌓아올려 수법이 정교하며 표면은 잘 가공 되어 마치 벽돌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탑신은 밑면이 178cm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cm 방형(方形)으로 만들었고, 1층 탑신 남쪽면 중앙에는 감실을 설치하였는데 화강석으로 외경 폭 65cm, 높이 70.5cm, 내경 폭 41cm, 높이 59cm의 틀을 짜서 판석으로 문짝을 세워 2짝의 문임을 나타내고 중심에 쇠 문고리를 부착하였다. 옥개는 전탑의 전통적 형식대로 추녀의 폭이 좁으며, 전각에서 살짝 들린 듯 하고 각층 전각 끝에는 풍경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옥개의 체감 현상도 탑신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옥개 받침은 1층 7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옥개 윗면의 층단도 1층의 9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 3단이 되었다. 추녀에는 풍경이 있고 상륜부에 화강석으로 만든 노반이 있고 그 위에 모전재 2기를 얹어 청동제 상륜을 받치고 있다.
신라 사적기(史蹟記)에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자장율사(慈裝律師)께서 정암사를 창건하고 7년 후에 수마노탑을 건립 하였다고 전하나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모전석, 층수는 7층, 기단 6단, 탑신은 감실 문비음각으로 상륜부는 청동제로 되었다.
사적(史蹟)에 의하면 이 태백산(현 함백산) 삼갈반지(三葛盤地)에 삼봉이 있으니 동은 천의봉, 남은 은탑봉, 북은 금탑봉이며 그 가운데 3탑이 있으니 첫째 금탑, 둘째 은탑, 셋째 마노탑 인데 금·은 두 탑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마노탑만 나타나서 전한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우며 탑의 기단부에 사리, 불지절, 불장주(佛掌珠), 염주, 패엽경(貝葉經)을 봉안하였다 하며, 이 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본국으로 귀국할 때(서기 643년) 서해용왕이 자장율사의 불도에 감화되어 용궁에 들어가서 용왕으로부터 수마노석을 받아 쌓아 올린 탑이라 한다.
이 탑을 세운 뒤 조선 숙종 39년에 취봉당자인과 일종스님이 주동하고 천밀스님이 화주(化主)하여 그해 5월에 수마노탑을 중수하였는데 8월 15일 낙뢰로 인해 탑이 파괴되어 6년 후에 천밀(天密)스님이 다시 발원하고 시주를 걷어 5층탑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영조(英祖) 46년에 취암성우화상(翠岩性愚和尙)이 발원하여 은휴당시연과 단일당홍관이 협력하여 탑을 중수하고 찰우대를 조성하였고, 익년 5월에 낙성하였는데 원탑이 7층, 동유장엄(銅鍮莊嚴)이 5층, 풍경이 32구였다.
이 풍경은 바람만 슬쩍 불어도 맑은 소리가 공중에 가득 찼다.
그 뒤 백여년이 지난 광무황제 9년에 얼암서보화상(蘖癌西寶和尙)이 탑이 기우는 것을 보고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더니 탑 우측 부근에서 한 무더기의 마노 보석을 발견 하였다고 한다.
그때 봉은사에서 화엄경판(華嚴經板)을 조각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출한 남호영기 대사와 협력하여 동년(서기 1872년) 5월에 준공했다.
천밀스님이 이 탑을 중수할 때 금·은 식기(食器)에 사리를 담아 봉안 하였던 것이 탑과 함께 파괴 되었으므로 그 속에서 염주 81교와 금주 5교 등을 걷어 1층 탑신에 안장하고 7층탑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뒤에 49보령(寶鈴)이 하늘에 솟는 듯 했다고 한다.
그후 100여년이 지나 탑이 도괴 직전에 놓여 1972. 11. 8.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국비 340만원을 들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으나 광산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지역의 특성상 지반이 침하되고 탑의 균열이 심화되었다.
'96년 총사업비 1억 9천 6백만원을 들여 기단석 이상 전면을 해체 보수 및 탑 보호시설·진입로를 정비하였다.
- 수마노석 (水瑪瑙石) : 물에서 나는 마노석. 마노석은 보석의 일종
- 모전석탑 (模塡石塔) : 재료는 돌을 사용하였으나 돌을 벽돌처럼 깎아 세워 겉모양이 벽돌과 같이 생긴 탑 (모방할 模, 벽돌 塡)
- 방형 (方形) : 네모반듯한 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