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8월 정선을 1박 2일로 여행하면서 그 곳의 음식문화를 중심으로 쓴 기행 수필이다. 글을 쓴 사람은 수필가이며 한국수필작가회 이사이다. 이글은 글쓴이의 홈페이지 '느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에 게재되어 있고, 한국수필작가회 홈페이지 연재 수필란에 7회에 걸져 연재 되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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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프롤로오그
정선에 가고 싶었다. 정선에 가면 산과 물이 변함없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또 예스러운 우리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산은 여전히 푸르고 강물은 여전히 쉼 없이 하얀 자갈을 굴리며 흐를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사는 집은 예전 그대로 흙과 돌로 빚어 만들었고, 먹고 입는 것들이 모두 예전처럼 정선의 흙에서 뿌린 내린 것들일 것 같았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8월 6일, 1박을 예정하고 아내와 친구 내외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사실 문화 탐방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하고, 함께 가는 사람들의 관심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내와 친구 내외와 떠나는 여행은 대개 그냥 눈요기만을 위한 관광으로 끝나기 쉽기 때문에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고장에 비해 토속적인 음식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가는 날이 5일장인데다가 일행 네 명이 모두 토속적인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안목이 있어서 미리 우려했던 것보다 오히려 먹거리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한국수필작가회 홈페이지에 음식 이야기 연재를 맡은 나로서는 여간 의미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운전에 부담이 적으면서도 자연 경치가 아름다운 길을 택했다. 청주에서 괴산을 거쳐 장연 느릅재를 넘어 내려가다 보면 길 양편에 옥수수를 파는 원두막이 있다. 그 자리에서 가마솥에 쪄서 팔기도 하고, 방금 산밭에서 따온 옥수수를 자루에 한 30개씩 담아 판매하기도 한다.
대학 찰옥수수는 이곳이 고향인 충남대학교 교수 최봉호 박사가 개발하여, 마땅한 소득 작목이 없던 고향사람들에게만 신품종으로 공급하여 독점 재배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장연면에서만 연간 30억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니 고향에 대한 대단한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머문 원두막의 할머니도 작년 옥수수 철 한 보름 만에 1억 원의 소득을 올렸다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대학 찰옥수수의 진미는 이곳 느릅재로부터 수안보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지나는 일대의 간곡리에서 생산된 것만이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전국 각지의 대학찰옥수수의 실체를 알만하다. 옥수수의 본고장이라는 강원도 정선의 옥수수도 억세고 딱딱해서 이곳의 옥수수 맛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단골로 들르는 할머니에게 옥수수를 부탁하니 산밭에서 금방 따와서 삶았다는 옥수수를 아직도 장작불이 타고 있는 가마솥에서 꺼내 주었다. 나는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 통을 먹을 만큼만 쉬어 가기로 했다. 대학찰옥수수는 알이 가지런하고 희고 윤기가 자르르 흘러서 계곡물에 비누세수하고 촉촉이 물기 묻은 산골색시의 하얀 볼처럼 청순하다. 터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만지면 끈끈하다. 껍질이 얇아서 치아가 약한 사람도 입에 대기만 하면 톡톡 터져서 씹는 무담이 없다. 게다가 껍질이 얇아 이에 끼지도 않아 먹고 나도 입안이 개운하다. 설탕 맛이 아닌 심산의 다래맛 같은 단맛, 차좁쌀로 빚은 인절미 맛 같은 고소함, 산골바람 같은 시원하고 그윽한 맛이다. 쉬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돌아서면 바로 생각날 정도로 소화도 잘 된다.
게다가 괴산 장연 사람들의 인심은 대학찰옥수수 맛만큼이나 구수해서 한 자루 사다가 선물한다면 그들의 인심을 고스란히 전하는 셈이어서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도 돌아오는 길에 한 자루씩 사기로 하고 페달을 밟았다. 뒷좌석에서 여인네들은 아직도 옥수수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다.
우리는 단양을 거쳐, 영춘, 영월의 하동면, 녹전을 지나 정선군 신동읍에서 약간 헤맸다. 지도에 나와 있는 지방도가 공사중이라 폐쇄 되었는데도 안내판이 없어 고개를 중간 쯤 올라갔다가 되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그 절경과 맑은 공기 때문에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았다. 다시 민둥산 입구를 지나 동면의 몰운대, 소금강에서 맑은 물에 발을 담근 후 화암동굴을 구경했다. 화암동굴은 금을 채굴하던 갱도와 자연 동굴이 이어져 훼손되지 않은 테마가 있는 동굴이었다. 석공예 단지를 거쳐 드디어 정선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길은 동강을 들러 김삿갓 계곡, 의풍을 거쳐 괴산으로 되짚어 오기로 했다.
정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여러 가지 감흥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 대신 정선의 황기 족발, 메밀로 만든 음식, 감자떡, 곤드레밥, 수수부꾸미, 올챙이국수와 돌아오는 길의 괴산의 올갱이국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먹거리라는 것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시작이 아닌가 한다.
2. 황기족발
점심 겸 저녁으로 안내 전단에서 본 황기족발을 먹기로 했다. 아내가 한 번 가봤다는 유명한 동광 식당을 간신히 찾았다.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닌데 사람들이 방안에 가득하다. 그것만 봐도 그 맛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족발의 터벅터벅한 맛과 노리끼리한 냄새 때문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황기 족발은 다르다고 권하므로 먹기로 하였다. 족발은 대개 접시 위에 살을 발라낸 뼈를 놓고, 살을 보기 좋고 얇게 저며 가지런히 뼈다귀를 덮어서 나오게 마련이다. 기름기가 빠진 족발 살은 입안에서 기름지게 씹히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노리끼리한 냄새와 함께 텁텁한데다가 그 질긴 껍질의 살이 이에 낄 뿐 아니라, 입술 주변에 돼지 냄새가 배고 기름이 묻어 미끈덕거리기 때문에 더 그랬다. 족발을 먹을 때는 항상 돼지 발목이 반쯤 빠지던 시골 돼지우리의 질퍽한 오물이 연상되곤 하였다.
어떤 모습으로 상이 나올까를 그리고 있을 때 미처 수염을 깍지 못한 얼굴 하얀 총각이 상을 내왔다. 그런데 황기 족발을 칼로 썰지 않고, 손으로 쪽쪽 찢은 것 같아 보인다. 보기에도 연한 고기를 시골 막걸리집에서 배추겉절이 담듯 그렇게 한 접시 수북하게 담아서 내왔다. 빛깔 또한 생기를 잃은 그런 빛깔이 아니다. 마늘, 고추, 새우젓, 야채를 곁들인 것은 여느 집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된장은 좀 다르다. 시장에서 파는 쌈장이 아니다. 윤기가 나고 색이 짙으며 훨씬 차져 보인다. 젓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입안에 침이 돌 정도로 짜고 고소하다. 정선에서 나는 우리 콩으로 만든 집된장인가 보다.
족발은 삶을 때 황기를 넣었는지 윤이 나고 꼬들꼬들해 보인다. 총각의 말을 빌리면 계피, 칡뿌리, 생강 등 여러 가지 약초를 넣는다고 한다. 특유의 돼지 냄새도 나지 않는다. 크기도 너무 크지 않아 상추가 아닌 들깻잎에 싸기에도 좋았다. 깨끗한 깻잎에 꼬들꼬들한 족발을 한 점 깔고, 주둥이와 꼬랑지가 붉고 몸뚱이는 하얀 그야말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앞발을 머리에 대고 먼 고향바다를 그리워하는’듯한 새우젓을 서너 마리 올려놓고, 정선 고추와 정선 마늘을 하나씩 그 옆에 뉘고, 짭짤하고 고소한 정선 집된장으로 마감하여 왼손에 들고, 노란 가시오가피주 한 잔을 들이킨 다음, 입을 크게 벌려 씹어 보니, 연하게 씹히는 맛이 고추 마늘의 매운맛과 된장의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어렵고 복잡한 세상사를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맨 나중에 묻어나는 집된장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 준다.
우리는 가시오가피주를 연거푸 비우며 정신없이 쌈을 쌌다. 돼지 발목이 드러나 살을 다 발라 먹도록 시골 돼지우리를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돼지 발목뼈를 들고 묻어 있는 살을 발라 먹었지만 나는 참았다. 절제를 위함이다. 후식으로 황기 수정과를 마시니 입 언저리 돼지기름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가시오가피주에 약간의 취기가 돌고 시장기가 가시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하루 종일 대지를 불태우던 태양이 좁은 하늘에서 노을도 없이 어둠을 지고 산자락으로 내려온다. 천리 길 운전의 피로가 조양강을 거슬러 가리왕산 꼭대기로 스믈스믈 올라가는 듯했다.
황기 족발은 옛날로 돌아가면 정선에서는 서민들이 먹는 고급 음식이었을 것이다. 메밀과 옥수수, 조밥, 보리밥으로, 옥수수, 감자로 연명하던 옛날로 돌아가면, 쌀밥이나 돼지고기는 서민들에게는 구경하기 힘든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족발은 그래도 이들에게 가끔씩 목의 기름을 돌게 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선에는 여름의 약재인 황기를 가미하여 몸의 허함을 보했을 것이다.
알아보니 하루에 이 식당에서만 족발을 두 가마 정도 소비한다고 한다. 두 가마 모두를 정선 사람들이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 같은 외지 사람들의 향유일 것이다. 옛날 한여름의 더위에 농사로 지친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영계백숙을 대신하는 보신재였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여 오늘의 향유와 취기가 쓸데없이 부끄러웠다.
3. 메밀의 신화
메밀은 메마르고 거친 땅도 마다하지 않는다. 추위에도 꽃을 피우고 까만 열매를 맺는다. 무서리가 내려 그 가늘고 연약한 붉은 대궁이 흐물흐물해져도 다만 한두 알갱이라도 열매를 맺고야마는 것이 메밀이다. 또 여름에 씨앗을 뿌리거나 가을에 파종을 하거나 불평하는 법이 없이 뿌려주는 대로 하얀 꽃을 피우고 때가 늦었거나말거나 기어이 열매를 맺는 것이 메밀이다.
어려웠던 시절 척박한 기후와 토질에서 아무렇게나 자라서 거칠고 투박한 메밀을 먹으면서 정선 사람들은 부드럽고 맛좋은 쌀밥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러나 먹거리에서 주림을 치유하는 것보다 미각의 쾌락에 더 비중을 두는 요즈음, 거꾸로 거친 메밀로 빚은 음식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그래서 5일장을 맞은 정선 먹자 골목에는 몰려든 배불뚝이들로 들끓었다.
우리는 황기 족발을 쌈으로 싸서 가시오가피주로 가슴이 화끈거리자,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는 콧등치기라는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차림표에 그냥 ‘콧등치기 삼천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어떤 음식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콧등을 친다는 이름이 어떤 뜻일까 제각기 풀이를 해가면서 즐겁게 웃었지만 정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수염 못 깎은 총각에게 물어 그것이 국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면을 후루룩 들이켤 때 국물 속에서 엉켜있던 굵은 면발이 용수철같이 일어나 콧등을 친다고 콧등치기 국수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리니 콧등치기가 나왔는데, 메밀로 만든 칼국수라고 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먹는 막국수에 비해 굵고 우리밀 칼국수보다 색이 짙다. 얇고 납족납족해서 우리밀 칼국수처럼 보였다. 콧등치기 국수는 메밀로 면을 만들고 국물을 따로 끓여 국물에 면을 넣고 다시 끓인다고 한다. 콧등치기 국수의 국물 만드는 데는 비법이 있는 듯했다. 멸치 맛도 나는 듯하고, 된장 냄새도 나는 듯 하고, 우거지의 시원한 맛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해먹는 칼국수처럼 감자도 들어가서 담백하고 진한 맛을 내는데 한 몫 하고 있다. 호박눈썹나물, 오이채, 계란 지단 등으로 고명을 해서 보기도 좋다.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동안 한 가닥도 흘러내리지 않아서 좋다. 입에 넣자마자 입천장으로 한 번 꾹 누르니 씹을 것도 없이 넘어가 버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데 입에 들어가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이 시원하다. 황기 족발로 배를 채웠기 때문에 2인분을 네 그릇으로 나누어 먹었는데 배는 부르면서도 후회했다.
콧등치기 국수는 옛날 아우라지에서 뗏목을 띄우고 서울로 향할 때 인부들이 정선에서 잠시 멈추면 아낙네들이 급하게 끓여서 대접한 삶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라고 한다. 정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조양강을 바라보니 그 애절한 사연이 가슴을 찌르는 듯하다.
이튿날은 정선 장날이었다. 아침으로는 곤드레 밥을 먹고, 메밀 부침개 몇 장을 주문했다. 사실 녹두전을 비롯한 다른 부침개들은 따끈해야 제 맛이지만, 메밀전은 식어도 맛을 잃지 않는다. 또 메밀전은 얇을수록 맛이 난다. 이곳 메밀전은 다른 곳보다 얇고 크면서도 값이 싸서 놀랐다. 여인네들이 전을 부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메밀을 지룩하게 반죽하여 자그마한 국자로 번철에 얇게 깔아놓고, 물을 완전히 빠지도록 절인 배추를 올려놓아 지져 내고 있었다. 우리네 밀가루 부침개 만드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찢어지지 않으면서도 얇게 구워내는 그들의 손놀림이 신기하다. 메밀전은 양념간장 맛이 좋아야 한다. 나는 원래 메밀전이라면 다 좋아해서 맛의 청탁을 가리지 못한다. 아침밥을 잔뜩 먹었는데도 번철에서 금방 구워 나오는 메밀전 한 접시를 금방 비웠다. 운전 때문에 반주를 걸치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메밀전을 부치는 한 옆에서 메밀전병을 만들고 있었다. 메밀전 만드는 방법으로 조금 더 작게 전을 만들고는 얼큰한 김장 김치와 잡채, 고기를 다져서 만두속을 넣듯이 속을 박고 전을 덮어 또르르 말아서 뒤집으면서 구워내는 것이다.
메밀전병은 식어도 맛이 변하지 않으므로 아내들이 간식거리로 몇 점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길가 바위에 앉아 동강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바라보면서 먹었다. 그 얼큰하고 매콤한 맛이 만두의 그 느끼한 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쫄깃하게 씹히는 메밀의 구수하고 냉랭한 맛과 속의 얼큰한 열기가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메밀은 서늘해서 찬 음식에 속한다고 한다. 요즘에는 먹거리에 철을 가리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메밀은 속을 차게 하기 때문에 여름에 먹어야 한다. 열기와 습기가 많은 사람이 메밀을 먹으면 몸속에 있는 열기와 습기가 빠져 나가 몸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열과 습이 많다는 내에게도 꼭 맞는 음식이 아닌가 한다.
메밀은 강원도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 해온 먹거리이다. 메밀로 만든 음식은 옛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메밀은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척박한 기후 토질에도 열매를 맺고야 마는 두메의 작물이다. 이런 생명력이 메밀묵, 전병, 부침개, 콧등치기국수 등으로 우리 민족의 생명을 면면이 이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제 풍요의 시대를 맞아 지나친 영양으로 지친 현대인의 성인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 질 높은 먹거리가 되었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메밀의 생명력은 시공 뿐 아니라, 삶의 질의 수준도 초월하여 그 은혜를 인간에게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원시의 것, 자연 그대로의 것, 우리 땅에서 난 것이 우리 몸에 가장 잘 맞는 보양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4. 수수부꾸미와 감자떡, 술빵
돌아오는 길에 동강의 절경을 보기로 한 우리는 간식거리를 몇 가지 더 사기로 했다. 아직도 푸른색을 벗지 못한 사과 몇 알과 강원도 옥수수를 사고 시장을 기웃거렸다. 시장에는 할머니들이 정선의 토산품임을 증명하는 명찰을 목에 걸고 고사리, 더덕, 황기, 산나물을 팔고 있다. 고사리를 비롯한 산나물을 좀 사고 돌아오려는데 수수부꾸미를 만들어 파는 사십대 중반의 여인이 있었다. 인상이 참 좋았다. 순박한 미소가 넘치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엷은 보랏빛 수수가루 반죽을 그릇에 담아 놓고 땀을 흘리며 부꾸미를 만들고 있었다. 수수부꾸미는 어렸을 때 밭에 드문드문 심어놓은 수숫대에서 찰수수 몇 가지를 수확하여 그걸 맷돌에 갈아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기억에도 새롭다.
부꾸미는 찰수수가루를 반죽하여 뜨겁게 달군 번철에 기름을 두른 다음 올려놓고 지진 후에 팥이나 동부 같은 것으로 만든 속을 넣고 반쯤 접어서 커다란 반달 모양 지져낸다. 수수가루 반죽이 되직할수록 부꾸미는 차지게 익는다. 부꾸미가 익어갈수록 더 붉은 보랏빛을 띠었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부꾸미를 만드는 여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담기어 있다. 삶의 고달픔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따끈따끈한 수수부꾸미를 몇 점 샀다. 그 자리에서 하나씩 맛보니 좀 달기는 했지만 옛날로 돌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순박한 미소의 여인의 장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옆에는 감자녹말을 내려서 빚은 감자떡도 시루에서 뜨겁게 익고, 또 비슷하게 생긴 시루에서 노란 옛날 찐빵이 찐빵만이 가지고 있는 냄새와 김을 풍기며 익어가고 있다. 우리는 좀 기다리다가 거뭇하면서도 속이 말갛게 비치는 감자떡과 새콤한 술 냄새가 나는 찐빵을 샀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약속한 것보다 자꾸 몇 개씩 더 담아 준다. 손해날 리는 없지만, 우리가 되레 손해를 걱정하니, 마수기 때문에 정선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내년 이맘 때 한 번 더 오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선 먹자거리의 인심을 대변하는 듯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지녀온 먹거리에 대한 정선의 인심을 담은 정선의 미소를 지닌 여인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다.
동강으로 돌아오는 길은 황폐화 되어 있다. 사진에서 본 아름다운 산하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길은 있다가 끊어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다듬어지지 않은 도로와 마을이 헝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래프팅을 하는 청소년들만이 강에 울긋불긋하다.
가장 절경이라고 할 만한 곳에 차를 세우고 그늘에 앉아 우선 옥수수를 꺼냈다. 딱딱하고 푸석해서 괴산 장연 대학찰옥수수 먹던 입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수수 부꾸미 생각이 났다. 하나씩 꺼내 먹으니 찰수수의 짠득짠득하게 씹히는 고소하고 그윽한 맛이 어디 견줄 수 없을 정도이다. 수수부꾸미는 뜨거운 번철에 다시 구워서 약간 누른 자국이 있어야 제 맛이 나는데 식은 다음에 먹어도 어릴 때 먹던 기억을 충분히 되살릴 만하다. 햇살은 뜨겁게 세상을 달구지만 아름다운 정선의 산하를 바라보며 정선의 토속음식을 맛보는 기분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감자떡은 감자녹말을 빚어서 속을 넣고 송편을 만들듯이 꾹 주물러 놓은 것인데, 다른 어느 전분보다도 찰지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떡도 역시 차지다. 우선 엷은 검은 빛이지만 투명하여 속이 다 보여서 입맛에 맞는 것으로 골라 먹기 좋다. 떡을 봉지에 담을 때 참기름을 충분히 묻혔기 때문에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빵은 하나도 먹어보지 않고 그냥 몇 개만 샀는데, 정말 진미이고 추억의 맛이었다. 옛날 밀농사를 지어 타작을 하면 밀을 물에 깨끗하게 헹구어 말린 다음, 마을 방앗간에서 제분을 하면, 그 하얀색이 그렇게 곱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이 밀가루로 칼국수, 수제비 같은 걸 해먹기도 했는데, 우리가 가장 기다린 것은 빵을 해먹는 것이었다. 밀가루에 막걸리를 약간 넣고 반죽을 하여, 커다란 다라에 담아 장독대에 놓으면 뜨거운 볕에 부풀어 오르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였다. 여기에 팥소를 넣고 동글동글하게 빚어 솥에 찔 때, 새콤하며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노랗게 익어가는 빵을 상상하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런데 바로 그 맛이었다. 맛만 보아도 아무런 화학 약품이 들어가지 않은 게 틀림없다. 막걸리 향이 솔솔 풍기면서 입안에서 씹히는 그 부드러움이 요즘 흔히 추억의 빵이라고 대량생산하는 그런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빵을 더 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이겠거니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
수수나 감자, 술빵이 몸에 어디 좋은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몸을 보양하는 먹거리가 아니라 마음을 보양하는 음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선의 먹자 거리는 하나하나가 여인네의 손맛이고, 그들의 사고와 정서의 맛이고, 그들의 좌절하지 않는 미소의 맛이기 때문이다. 정선의 먹자거리는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영혼의 장터이다. 큰 손으로 듬뿍듬뿍 담아 주던 정선의 인심을 담은 여인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5. 곤드레밥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시장 먹자골목을 배회하였다. 시장은 상인들이 전을 벌이느라 분주하게 오간다. 어느 깔끔하게 생긴 작은 음식점 앞에서 차림표를 기웃거리니 곤드레밥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선 음식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우리는 생소한 이 음식을 먹어 보기로 했다.
곤드레밥은 비빔밥 종류라 한다. 아침에는 그저 흔히 먹는 해장국 같은 걸 찾던 우리는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주인이 곤드레밥을 자꾸 권하고 아침부터 도로 나오기가 미안해서 그냥 먹어 보기로 했다.
물을 가지고 들어온 아들인 듯 건장한 청년이 곤드레에 대해 설명해 준다. 곤드레 나물은 해발 700m 이상의 고지에서만 자라는데 엉겅퀴의 일종이며, 정선, 평창, 영월에서만 난다고 한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먹었지만, 최근에는 외지의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성인병에 좋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는 별 기대를 하지 않으며 묵나물을 넣고 비벼 먹는 비빔밥 정도로 생각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밥을 새로 짓는다고 한다. 한참 만에 상을 놓는다. 상에는 양념간장, 호박나물, 열무김치, 된장찌개, 오징어젓갈 등이고, 나박김치는 사람 수대로 네 그릇이다. 국물대신 나박김치를 먹으라는 모양이다. 양념간장은 우리 고장에서 별미인 콩나물밥을 먹을 때처럼 마늘다짐, 고춧가루, 실파, 깨소금을 섞고 참기름을 넣은 듯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된장찌개는 흔히 먹는 것과 좀 다르게 표고버섯 등 여러 가지가 들어가서 짜고 걸쭉하였다.
밥이 들어왔다. 밥은 솥 째 들고 들어와서 그 자리에서 널찍한 그릇에 퍼주었다. 밥 위에 곤드레 나물을 얹어 지었는가 보다. 그런데 한 눈에 봐도 실패작이었다. 비빔밥은 고슬고슬해야 하는데 지룩하게 지었다. 실망한 나는 이 밥이 실패작이 아니냐니까 솔직하게 시인한다. 일찍 손님을 예상하지 못해서 서두르다가 그렇게 되었단다. 그 솔직함이 고마웠다. 그러나 금방 지은 정성에 감사하며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청년은 옆에서 드라마 촬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들고 지시하듯 먹는 순서를 하나하나 일러준다. 우선 양념간장을 조금 놓고 비벼서 한 숟가락 입에 넣어 봤다. 고지대의 산나물이 대개 그렇듯이 크고 소담하면서도 연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다래순묵나물보다 연하면서도 취나물 향기보다 고상하고, 고사리보다도 고소하고, 참나물보다 그윽한 맛이었다. 하얀 밥에 까맣게 섞인 곤드레 나물의 빛깔도 보기 좋았다. 곤드레나물에는 약간 간이 배어 있고 나물 맛이 아닌 고소함이 있다. 청년은 곤드레 나물을 미리 약간 간을 하고 참기름에 무쳐서 밥이 끓을 때 밥 위에 얹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잘못해서 밥이 지룩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밥 한 대접을 간장에 비벼 먹기도 하고, 된장찌개에 비벼 먹기도 하였다. 곤드레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시원하고 새콤한 나박김치로 마무리를 하니, 아침 식사이지만 기름진 해장국보다 개운하였다.
곤드레밥도 역시 옛날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었던 두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었던 음식문화이다. 그러면서도 단백질, 칼슘, 비타민 등 고급음식에서 갖추지 못한 영양을 고루 갖추었다고 하니 자연의 배려에 감사할 뿐이다.
자연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 존재한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연이라는 커다란 하나의 생명체에서 곤드레라는 일부가 사라진다면, 콩팥이 상하면 인명이 위태롭듯이 자연도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정선에 전래되는 수없는 문화 중에 어느 하나가 사라진다든지 변질된다면 당장은 큰 불편이 없겠지만, 그것은 정선 문화라는 커다란 하나의 생명체에서 일부 장기가 망가져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늘의 여행이 한국문화의 일부로서 소중한 정선 문화의 생명 유지를 위한 작은 디딤이라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는 길의 가슴이 뿌듯했다.
6. 추억의 올챙이국수
올챙이국수는 예전에는 올챙이묵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만드는 과정이나 먹는 방법이 국수와 묵의 중간쯤 되기 때문에 묵과 국수로 불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모양이 올챙이를 닮았다는 데에는 모두 동감인 것 같다. 사실 만드는 과정을 보면 묵에 더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올챙이묵을 처음 알게 된 것은 70년대 초 단양 의풍학교에 근무할 때다. 거기는 주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냉이가 많았다. 강냉이는 삶아도 먹고 밥에 섞어 먹기도 했다. 가을에 강냉이를 수확하여 가마솥에 넣고 삶아 말려서 겨울에 다시 삶아 양식으로 먹기도 하고, 낟가리처럼 쌓아 말려 낟알을 따서 쌀이나 보리쌀과 반반씩 섞어 밥을 짓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먹는 도시락의 옥수수밥은 도시락이 쌀밥이 아니라고 투덜거렸던 내게는 보는 것 자체가 아픔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만 해 먹는 것이 아니라, 술빵을 쪄 먹듯이 좀 있는 집에서는 올챙이묵이란 것을 해먹었다.
은주네는 학교에서 개울을 하나 건너 언덕배기에 살았다. 나는 남자애들 보다 더 말괄량이인 은주보다 은주 아빠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건 핑계일 뿐이고 은주보다 더 말괄량이인 은주 엄마를 좋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주 엄마 내외는 알뜰하고 건실한 농부였다. 아이들을 대처에 내보내 공부시키고, 그 아이들이 성공하면 언젠가는 갑갑한 준령을 넘어가 살고 싶은 산골사람의 평범한 꿈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다. 은주 아빠는 대처사람인 선생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은근이 대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남편의 속내를 헤아리는 그네는 종종 별식을 해 놓고 은주를 보냈다.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저녁 식사를 맞아야 하는 나도 역시 그네의 별식과 별식같이 구수한 삶의 푸념이 좋아 단발머리를 팔락이며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오는 은주를 기다렸다. 아이가 초등학교 삼학년이 되었어도 같은 이십대라 마음은 좀 통했을 것이다. 그네의 올챙이묵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저장 옥수수는 더 익어야 하고 벼베기는 아직 먼 초가을 산골에는 선들바람이 불었다. 은주가 징검다리를 건너왔는데 무얼 했냐니까 올챙이묵이라 한다. 나는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 이내 올챙이의 하얗고 오동통한 배때기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것 같은 감각이 살아와서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만드는 과정을 봐야하겠기에 은주 손을 잡고 서둘러 개울을 건너 언덕으로 올라갔다.
은주엄마 내외는 올챙이묵을 만들고 있었다. 옥수수가루를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묵을 쑤듯이 아주 되직하게 끓인다. 노란 옥수수 죽이 하얀 김을 내면서 끓는다. 옛날 초등학교 때 끓여주던 옥수수죽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은주 아빠는 그 굵은 팔뚝에 울퉁불퉁한 근육이 일어나도록 커다란 주걱으로 젓는다. 구수한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다. 옥수수죽이 다 끓어 되직해지면 커다란 찬물이 담긴 다라 위에 구멍이 송송 뚫린 박바가지를 놓고 옥수수죽을 붓는다. 뚫린 구멍으로 옥수수죽이 송송 떨어진다. 떨어지자마자 등이 하얀 올챙이로 살아서 찬물 속으로 헤엄쳐 사라진다. 차가운 물에 바로 식어 굳으면서 올챙이 모양이 된 것이다. 그 올챙이들을 찬물에 한두 번 더 헹구어 다시 물에 담가 두었다가 조리로 건져서 묵처럼 갖은 양념을 한 간장국물에 말아 먹는다. 시원한 열무김치국물에 말아 먹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른 가을 언덕위의 마당 평상에 앉아 옥수수 엿술을 마시면서 올챙이묵을 먹었다. 올챙이묵은 씹을 틈도 없이 사르르 헤엄쳐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다. 남는 것은 간장의 양념 맛뿐이다. 올챙이 묵 맛을 제대로 보려면 입안에 들어간 올챙이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입안에 붙잡아 자근자근 씹는 기술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면 드디어 옥수수를 뜯어먹는 것만큼 힘들이지 않고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옥수수의 특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젊으면서도 은주 아빠랑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은 은주 엄마의 푸념 겸 자랑을 들으면 산골하늘에도 가을 달이 떠올랐다. 호두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한결 목덜미에 서늘하다.
그 올챙이묵이 정선에서는 올챙이국수가 되어 있었다. 콧등치기국수로 저녁이 시답잖은 울트라마라토너인 친구 연선생의 시장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다 말고 일어나 찾아간 시장 먹자골목은 이튿날 5일장을 맞기 위해서 올챙이묵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친구가 된장찌개백반을 비우는 동안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의풍의 은주엄마를 생각했다. 사는 게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본 두 내외의 사는 모습이 새삼 그리웠다. 입안에 은주엄마의 올챙이묵이 살살 기어들어가는 것 같다.
산골 사람들에겐 보릿고개 말고도 배고픔의 고개가 또 하나 있었다. 보릿고개처럼 막막하지는 않지만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늦여름의 고개도 그들에게는 참으로 넘기 힘든 고개였을 것이다. 벼베기는 멀었고 옥수수는 다 익지 않은 늦여름의 오후도 배고픔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덜 익은 옥수수를 따서 삶아 반죽하여 올챙이 묵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또 옥수수 먹기에 신물이 난 여인네들이나 치아가 약한 노친네들을 위해서 생각해 낸 가련한 지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그 시절에 올챙이묵은 고급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고픈 이 음식에 의풍의 추억보다 애처로움이 담겨있는 것은 나도 그들과 같은 보릿고개의 한 동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의 애환이 담긴 올챙이묵이 정선 평창 영월의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정선에서 올챙이묵은 끝내 먹지 못했다. 그 이름이 올챙이국수로 바뀌어 생소할 뿐 아니라, 두메의 구황식품이 오늘은 배부른 사람들의 기호 식품도 넘어서서 흥밋거리가 되어버린 아픔 때문이지도 모른다. 마치 보리개떡을 먹으며 기억할 과거의 아픔이 없는 철부지들처럼 나도 올챙이묵의 아픔을 이해할 자신이 없는 철부지 중의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7. 에필로오그
돌아오는 날 우리는 동강을 지나오기로 했다. 영춘에서 영월 하동면의 맛밭을 거쳐 옥동리 김삿갓 계곡 입구를 거쳐 녹전, 신동읍의 아리랑 학교, 남면의 민둥산 입구, 동면의 몰운대, 소금강, 화암약수, 화암동굴, 석공예단지를 들러 정선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아침에 북평면의 능선에서 바로 떨어지는 기이한 백석폭포, 노추산에서 발원한 양수인 송천과 임계면의 백봉령 등의 태백 준령에서 발원한 음수인 골지천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오장산의 물을 모아 내던지는 듯한 200m의 오장 폭포의 장관과 주변의 경관을 본 다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정선 오일장에서 주로 먹자거리를 돌면서 정선에 면면이 끊이지 않는 음식문화를 하나하나 접하며 우리 살아온 슬기에 공감하였다. 동강을 지나 신동읍으로 들어서 처음의 가던 길 녹전중학교 앞에서 갈 때처럼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이로써 나의 애마 무소는 정선에 한 바퀴 원을 그린 것이다.
동강을 지나며 산과 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지마는, 정선의 물은 그렇게 맑은 것은 아니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석회암 지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 그런지 물이 더럽지는 않으나 흐려서 강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벽과 폭포, 합수되는 곳이 많고 거기마다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 아우라지는 양과 음의 어우러짐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그 의미가 깊다. 결국 자연이란 양과 음의 어우러짐이라는 설렘과 짜릿함으로 생성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아닌가? 인간도 자연의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 아우라지에서 어우러지는 두 물줄기의 징검다리를 열일곱 아이들처럼 뛰어 건너면 흐릿한 안개 속에서 김유정의‘동백꽃’의 결말 부분을 읽으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향기 없는 성애(性愛)의 짜릿한 향이 감도는 듯했다. 이 골 저 골에서 뗏목을 타고 어우러져 만나면서 정선 사람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되고 자신을 산과 물과 하나로 생각하는 문화를 심고 가꾸어 꽃피워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그윽한 삶의 흔적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녹전에서 하동으로 내려오면서 1주일 전에 하루를 묵었던 김삿갓 계곡의 노루목이 또 그리웠다. 방랑시인인 김병연이 무덤이 있어서 김삿갓 계곡이라는 어색한 이름이 붙었지만 내게는 그냥 노루목이다. 노루목에 가면 옛날 내가 가르친 종칠이 아버지의 가게가 있다. 포실포실한 고랭지 감자를 넣고 아주 맵게 끓인 오리 전골이 일품이다. 노루목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충북이며 의풍이다. 용소에 차를 세우고 산그늘이 내려온 물가의 반석에 누워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30분 정도 죽은 것처럼 잠들었다. 600km 운전의 피로가 완전히 가시는 것 같다. 초임지인 이 의풍의 하늘 밑, 의풍의 산그늘, 의풍의 물은 내 심신을 안양(安養)에 들게 하는 것만 같다.
친구는 장연 느릅재에서 찰옥수수 한 자루씩 사주었다. 느릅재를 넘으면 무심천이 보일 것 같이 다정하다. 하루만 떠나 있어도 내 살던 울타리는 그리운 것인가 보다.
괴산에서 올갱이국으로 저녁을 먹었다. 차부올갱이국집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 입맛에 맞고 내가 잘 찾아가는 집이다. 집은 허름하지만 국 맛은 그 허름한 것만큼 깊다. 문경에서 태조 왕건을 촬영할 때 촬영진이나 배우들이 여길 많이 찾아온 모양이다. 벽에 그들의 흔적이 재미있다. 된장은 역시 고향의 것이 제 입맛에 맞는 것인가 보다. 내 집도 아니면서 그 맛이 정겹다. 장연의 대학찰옥수수나 괴산의 올갱이국 맛을 보면 역시 신토불이란 말은 피할 수 없는 진리이다.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청주의 들머리에서 그동안의 운전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심신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청주는 제 사람이 나갔다 돌아와도 호들갑떨며 반가워 할 줄 모른다. 신었던 버선을 벗어들고 뛰어와 반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벌써 눈언저리 이슬이 맺혀 빙그레 웃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깊은 반가움이 아주 깊은 기억 속에서 그동안 굳었던 온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는 듯하다. 그게 내 고향 청주다.
(2004.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