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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아침 평온한 저녁 행복한 정선 정선군소개

전민준

정선을 빛낸 인물을 소개해 드립니다

천혜의 자원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정선에 뿌리를 두고 정선을 빛낸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충신 전민준

고려말 72현중 1인인 全五倫선생의 현손(玄孫)인 전민준은 사람됨이 호탕하고 영매하며 담력이 컸고 겁이 없었다.

조선시대 문관품계인 종사랑(從仕郞)참봉 벼슬을 했고 1592년 임진란 당시에는 향임좌수로서 있었다. 이때 왜적은 백복령(白伏嶺)을 넘어 강릉에서 정선지방으로 향해 노략질과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이 지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왜병의 한떼가 정선에 이르렀다. 인심좋고 평화롭기만한 이 고을에 왜병이 침략하니 방비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당시의 형편으로는 적군의 총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 군수 정은급(鄭恩及)에게 고하여 일시피신하였다가 다시 도모하기를 강력히 권하여 현재 정선읍 귤암리(旌善邑 橘岩里)에 소재해 있는 나팔동굴(喇叭洞窟)에 관·민을 피신시키고 전민준공이 홀로 마을을 지키다가 적을 만났다. 왜병은 온 마을 주민들이 피난했음을 알고 공에게 군수의 거처와 양곡창고의 소재를 강요 하므로 전민준공은 스스로 나서서 내가 지방관이라 자처하였다. 왜병들은 그러면 어서 양곡이 있는곳을 말하라고 협박하였다.

이때 전민준공은 한마디로 『"우리 고을에는 한톨의 양곡도 저장되어 있는 것이 없다."』고 소리친 뒤 『"설사 양곡이 저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너희 왜놈들에게 줄 양곡은 한톨도 없으니 썩 물러가라."』하고 호령하며 꾸짖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왜병은 전공을 갖은 악날한 방법으로 고문을 하였으나 끝내 대답치 않자 왜병은 쇠사슬에 손바닥을 꿰고 한쪽 팔과 다리를 잘랐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왜병을 꾸짖으니 왜병은 전공을 살해하고 말았다. 왜적은 비록 전민준 공이 자기네에게 끝까지 항거하였지만 그 충성에 감동하여 그의 시신 등에다 조선충신(朝鮮忠臣)이라 쓰고 나무를 깍아 세운 후 가벼렸다.

이는 전민준공이 많은 주민이 희생될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사망되였기에 모든 군민은 그의 행적과 충절을 높이 추앙하기 위해 뒤에 정려각을 세우니 처음에 의풍정가(倚風亭街)에 건립하였는데 영조(英祖)7년(1731년) 군수 송필환(宋必煥) 공이 객사 3간을 동편에 이전 건립하고 1778년에 군수 서공(徐公)이 제문(祭文)을 지어 충신묘에 치제하였고 1976년 10월에 군수 박수균(朴壽均)공이 충신묘 비문을 지어 현재에 이르러 오고 있으며 정선군민은 전민준공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본군의 고유 문화행사인 정선아리랑제시 전야제로 충신 전민준의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담당부서 : 총무행정관
최종수정일 :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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